경제 불확실성이 커지고 기업들의 채용 수요가 줄어들면서 현재 직장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이직을 포기하는 캐나다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노동시장에서는 이를 ‘잡 허거(Job Hugger)’ 현상이라고 부른다.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새로운 기회를 찾기보다 현재 자리를 움켜쥐고 버티는 현상을 뜻한다.

팬데믹 이후 활발했던 이직 시장이 급격히 식어가면서 이 같은 현상은 고용 통계와 직장인들의 경험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최근 직장을 옮긴 한 30대 홍보(PR) 업계 종사자도 자신이 바로 그런 사례라고 털어놨다.

그는 2025년 말에 시작한 현재 직장에 대해 업무에서 성취감이나 목적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입사 당시 기대했던 성장 기회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만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떠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요즘은 어디도 사람을 뽑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며 “직장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해 매우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직률 반 토막… 직장에 머무는 사람 늘어

 

캐나다 노동시장의 변화는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캐나다 중앙은행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월에는 매달 전체 근로자의 약 0.82%가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이동했다.

반면 2026년 들어 월간 이직률은 0.41%까지 떨어지며 사실상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노동시장 전문가들은 이 같은 변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경제 불확실성과 채용 경쟁 약화를 꼽는다.

밴쿠버 소재 미래노동연구소(Centre for Future Work)의 소장인 노동경제학자 짐 스탠퍼드는 “사람들은 현재 노동시장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있다”며 “결국 가진 것을 지키며 버티려는 심리가 강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팬데믹 이후엔 ‘직원 우위 시장’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캐나다 주요 인력채용업체 로버트 하프(Robert Half)의 마이크 셰크트먼 수석 지역 이사는 팬데믹 직후 노동시장은 명백한 ‘구직자 우위 시장’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많은 근로자가 직장을 옮기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화됐고 기업들은 인재 확보 경쟁에 나섰다.

기업들은 명상실 설치, 유연근무제 확대, 각종 복지 혜택 제공은 물론 경쟁력 있는 급여 인상까지 제시하며 인재를 유치했다.

셰크트먼은 당시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직장을 옮기면 최소 10~20%의 연봉 인상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이런 현상은 특정 업종에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저채용·저해고’ 시대 도래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셰크트먼은 이제 직장을 옮긴다고 해서 큰 폭의 임금 인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장이 됐다고 진단했다.

로버트 하프가 기술, 인사, 재무 등 분야 종사자 1,38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6%는 더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 이직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고용시장도 크게 위축됐다.

 

캐나다 실업률은 현재 6.9%로 2023년보다 1.9%포인트 상승했다.

신규 일자리 창출도 둔화되고 있다. 캐나다 중앙은행은 현재 노동시장을 ‘저채용·저해고(low-hire, low-fire) 환경’으로 규정하고 있다.

기업들이 공격적인 채용을 자제하는 만큼 근로자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미국의 관세 정책과 높은 유가 등 경제적 불확실성이 이어지면서 기업들은 신규 채용에 더욱 신중해지고 있고, 근로자들 역시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셰크트먼은 설명했다.

그는 기업들이 신규 인력 채용과 투자 결정에 훨씬 더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시장 정체, 경제에도 악영향

 

전문가들은 이러한 노동시장 경직 현상이 경제 전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스탠퍼드는 노동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일수록 근로자의 능력과 관심사에 맞는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경제 효율성도 향상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현재처럼 이동성이 낮아지면 인력 배치의 비효율성이 커질 수 있다.

그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학력 인력이 단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상황이 늘어난다면 노동시장의 생산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시 커진 고용주의 힘

 

노동시장의 주도권도 다시 기업 쪽으로 기울고 있다.

채용 경쟁이 약해지면서 기업들은 팬데믹 이후 제공했던 각종 혜택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컨설팅업체인 Deloitte는 내년부터 유급휴가와 육아휴직 혜택을 줄일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화상회의 플랫폼 기업 Zoom 역시 육아휴직 혜택을 축소하고 있다.

북미 전역에서는 재택근무 정책을 축소하는 기업도 늘고 있으며, 온타리오주 공무원 조직 역시 예외가 아니다.

스탠퍼드는 이러한 권력 불균형이 근로자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과거에는 근로자들이 공정한 대우와 적정 임금, 교육과 승진 기회를 기대했지만, 이제는 현재 처우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압박받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수 인재 붙잡기 위한 보상은 유지

 

다만 모든 혜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셰크트먼은 일부 기업들이 핵심 인재를 유지하기 위해 성과급이나 특별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노동시장 분위기가 단기간 내 팬데믹 직후 수준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결국 현재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는 많은 근로자들은 당분간 현 직장에 남아 최대한 기회를 활용하는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서 인터뷰에 응한 홍보업계 종사자 역시 당분간은 회사를 떠나기보다 현재 직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며 버틸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으로서는 가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